대한불교 보문종 보문사


대한불교 보문종 보문사

  • 긍탄스님
  • 은영스님
  • 한봉덕 화백

긍탄스님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탑골승방 보문사를 총본산으로 하고 있는 대한불교 보문종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비구니스님들로만 구성된 종단이다. 보문종에서는 현재 설월당 긍탄스님을 창종주로 모시고 있는데, 일찍이 현실자각과 의식있는 비구니들을 양성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에 앞장설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마련 하고자 했던 긍탄스님의 원력이 비구니 종단의 창종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은 7세의 어린나이로 출가해 한 평생 생활 그 자체로써 정진수행의 면모를 보여주어 지금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스님의 유업을 받들어 오늘도 여법한 비구니 종단으로서 사회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보문종은 현재 40여 개 말사에 200여명의 비구니 스님과 5만 여명의 신도를 확보 하고 있다. 교세로 볼 때 그리 크다고 할 수 있는 종단은 아니나, 종도간의 우애와 화합이 가장 잘되고 있는 종단으로 손꼽는데 누구도 주저 하지 않는다.

한평생 고고한 삶

최초로 비구니 승단의 위상을 정립한 후 세납 96세의 일기로 고고한 삶의 여정을 마친 긍탄스님은 1885년 4월15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부친 경주 이씨 춘근과 모친 순흥 안씨 3남매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1891년 8월 모친에 의해 세장(世長)스님을 은사로 보문사에서 출가하게 되니, 나이 겨우 7세였다. 그 후 모친께서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석개암으로 출가해 『금강경』 과 『관음경』을 하루 한편씩 독송하는 한편 문수 지장, 관음주력과 여러 곳의 선방에서 화두 정진에 몰두해 당대의 고승 한암스님으로 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모친의 본분사가 스님의 수행에 많은 지침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모친의 영향에 힘입은 스님은 18세 되던 해인 1902년 금강산 장안사 주지 벽하스님께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03년 동학사에서 사집과 수료 후 1910년 만화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동학사에서 경학을 마친 스님은 1912년 보문사 주지로 부임해 33년간 재직하는 동안 정(定)과 혜(慧)를 닦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스님은 평소 다음과 같은 『초발심자경문』 의 경구를 인용하며 후학을 경책했다.

3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 백 년 동안 탐한 욕심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

三日修心 千載寶 白年貪物 一朝塵 (삼일수심 천재보 백년탐물 일조진)

스님은 또 “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학들을 향한 스님의 이러한 채찍질은 다름 아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거듭 세 철을 나는 것을 시작으로 범어사 대성암, 화엄사 구충암, 수덕사 견성암, 서울 정릉 대원사 등지와 칠불암, 수정암, 윤필암, 부도암 등 전국 각지의 선방에서 안거 수행을 멈추지 않아 당시 칭찬을 아끼는 이가 없었다.

파거불행노인불수 (坡車不行老人不修)

당시 스님의 도반이 한국불교계 최초의 비구니 선풍을 일으킨 묘리 법희 스님과 뒤를 이어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킨 만성스님 등이었다는 사실은 스님의 구도열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후학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하나의 일화는 오늘날 비구 스님들 못지 않는 수행 면모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킬 수 있었던 본보기가 되고 있다.

6·25 당시 보문사에서 묘리 법희스님과 함께 수행정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인민군의 습격을 받았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던지라 대중은 황급히 몸을 감추었고, 경내는 긴장감이 감돌던 터였다. 그러나 두 스님은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삼매에 들어간 두 비구니스님들의 얼굴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 앉아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인민군들은 감탄해 마지 않다가 조용히 경내를 떠났다. 적도 감화시킬 수 있는 금강과 같은 수행력, 그것이 두 비구니 스님이 후학에게 남겨준 납자의 참모습이었다.


70세에 이르러서는 피부병을 얻게 되었는데, 스님의 구도정진의 틈새를 피부병이라고 치고 들어 올 수 없는 없었다. 『금강경』과 「츰부다라니」 를 독송한 지 3년만에 완쾌를 보이는 위신력을 시현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년에 이르러서는 ‘수레가 부숴 지면 갈 수가 없듯이 노년에 이르면 수행하기가 어렵다. (坡車不行老人不修)’ 며 젊었을 때 부지런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일깨워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혜겸수와 불교의식의 전수

노스님은 비구스님에 버금갈 만큼 뛰어 났으며, 얼굴이 광채를 발하여 거기서 풍기는 기품만 보고서도 신도들의 환희심은 대단했다. 독특한 수행기풍으로 비구들의 의식을 일깨우며 한국불교의 한 축을 형성했던 스님에 대한 손상좌 법준스님의 회고담이다. 법준스님이 회상하는 노스님은 한마디로 비구스님 못지 않는 장대한 기품을 자랑했다. 그러나 남달리 자상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법준스님은 부언한다.
스님이 보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어느 날 맏상좌인 은영스님이 탁발을 나간 후 늦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상좌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스님은 저녁도 잊은 채 걱정이 태산이었다. 비구니라 할지라도 여자의 몸이라서 항시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은영스님은 “은사스님이 저토록 걱정하시니 내 어찌 탁발을 나갈 수 있겠느냐”며 그로부터 탁발행각을 그만 두게 되었다. 무릇 『부모은중경』 에 자식을 멀리 보내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상하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스님은 또 정혜겸수는 물론 몸소 실천불교에 앞장 선 이면에 전통 불교의식에도 남다른 점이 있었다. 나이 11세 때 이미 범패, 바라, 나비 등 불교의식 절차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탄인도(坦引導)스님’이었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탄생

오늘날 비구니 승단의 총림으로서 그 위상을 정립한 보문사의 사격(寺格)은 사실상 스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데 종도들은 이의를 달지 않는다.
1912년 보문사 주지로 부임하던 시절 당시 절은 말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절에서 잡일을 해오던 ‘청운’이라는 자가 자기 절의 땅문서를 훔쳐 그걸 판돈까지 다 써버린 일이 발생한 직후 였던지라, 가람을 다시 일으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처지 였다. 그 길로 탁발에 나선 것도 업연이라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일본 식량공급지로 전락하였고 인심이 흉흉하여 불안한 시기 였다. 때문에 양 어깨에 바랑자국이 나고 발꿈치가 불어 트도록 탁발을 다녀야 겨우 한 되박 정도의 시주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3년 동안 탁발한 결실로 겨우 절논 아홉 마지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보문사 중창의 시작이었다. 1917년에 『화엄경』 을 인간(印刊)하여 대웅전에 봉안 했으며, 만세루(지금은 소실됨) 수축과 관음전 신축, 대웅전 보수와 대종주조 등 호구책도 어려운 시기에 지금의 보문사의 기초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
보문사에서 비구니 수행가풍을 떨치며 30여 년간 가람수호에 진력해 오던 스님은 비구니들의 보다 더 응집된 수행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승단의 결집이 이뤄지고, 하나의 여법한 종단으로서 그 면모를 일신하니 ‘대한불교 보문종’의 창종이다. 1972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 스님이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고, 오늘날까지 비구니 승단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평생을 비구니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혼신을 다했던 스님은 1980년 8월 27일 허상을 거두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96세요 법랍89세였다. 문도들이 스님을 기리고자 유물전을 마련했으나, 애석 하게도 1백일 탈상 후 전기누전으로 전소 되고 말았다. 기이 한 것은 유물전에 모셔진 불상이나 탱화 등은 전혀 불길이 닿지 않은 채 오로지 스님의 유물만 뜬구름 없어지듯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손상좌 법준 스님은 “노스님께서는 평소 상을 내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아마도 상에 얽매이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자 몸소 자신의 물건만을 가져가신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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